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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디웃자만 사이드 누르시(Bediüzzaman Said Nursi)

Updated: Apr 10, 2021

모음집 저자


그는1877년 터키 비틀리스(Bitlis)주에 속한 누르스(Nurs) 라는 시골(아나톨리아의 동편)에서 태어났다. 아직 6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학문(İlme)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하였으며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떨어져 유학하였다. 그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들에 대해서도 아주 쉽게 이해하였으며, 신학 논쟁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를 도처에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기억력도 비상해 읽은 책을 아주 쉽게 암기하여 꾸란 암송은 물론, 이슬람 문명사를 수놓은 주요 학자들의 저작까지 술술 외웠다. 20년이나 걸리는 공부를 불과 3개월 만에 마치는 등 학자들조차 그의 범상치 않은 뛰어난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는 그의 출중함에 감탄한 한 이슬람 학자로부터 ‘시대에 비할 자가 없는 자’라는 의미의 ‘베디웃자만(Bediüzzaman)’ 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때가 바로 15살의 나이였다.


자신 스스로 과거의 사이드라는 의미의 ‘Eski Said’라 이름 지은 45세까지의 기간 동안 동부지역(Sark)과 서부지역(Garb)에서 여정을 보내며 이슬람 세상과 자신의 국가의 문제들을 스스로 겪고 몸소 체험한 후 가장 최우선으로 필요한 것이 교육이라는 것을 판단하였다. 이에 터키 동부지역에 ‘종교와 과학’을 함께 교육할 수 있는 대학교(Medresetüz Zehra)를 설립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1차 세계대전에 제자들과 함께 자원으로 민병대를 구성하여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였다. 러시아에서 포로로 잡혀 약 3년간 억류되었으며, 그 후 탈출하여 온 이스탄불에서 울라마 개혁 위원회의 회원으로 임명되었고, 이스탄불에 있는 동안 출판했던 후투바트 시테(Hutuvat-ı Sitte: 여섯 단계) 라는 이름의 작품으로 점령군에 항의하였다. 1922년 후에는 앙카라에 초대받아 그곳에서 새 정부의 장관들에게 이슬람의 상징들(아잔 등)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앙카라 정부에서 자신에게 제안한 종교부 장관자리를 거절하고, 1923년 5월 앙카라에서 반(Van)이라는 지역으로 가 그곳에서 경배와 꾸란의 사역으로 바쁘게 지냈다.


1925년에 반(Van)에서 지내고 있을 때 부르두르(Burdur)라는 지역으로, 또 그곳에서 바를라(Barla)라는 지역으로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그때부터 시작된 새로운 사이드라는 의미의 ‘Yeni Said’라는 이름으로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집필한 리살레이누르 작품들에서 신앙과 꾸란의 진리들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사역 활동이 국민들 사이에서 추앙받기 시작하자 반이슬람 정부에 의해 1935년에 에스키셰히르(Eskisehir)라는 도시에서, 1943년에는 데니즐리(Denizli)에서, 1947년에는 아피온(Afyon)에서, 1952년에는 이스파르타(İsparta), 카스타모누(Kastamonu), 에미르다으(Emirdağı)라는 도시들의 감옥에서 복역하게 되었고, 출소 후에도 유배와 연금 생활이 이어졌다.


그에게 허용된 것은 오로지 펜과 종이뿐이었으며 저술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한평생 그 집념으로 완성한 역작이 6,000쪽의 대작 꾸란을 주석한 <리살레이누르(Risale-i Nur)>이다. 서슬이 시퍼런 군사 독재 아래 출판과 복사는 불가능했다. 검열을 피하는 길은 오로지 필사뿐이었다. 6,000쪽의 책을 필사하고 또 필사함으로써 마을에서 마을로, 이웃에서 이웃으로 퍼져갔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터키 전역에 전파되었으며 현재는 전 세계에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샨리우르파(Şanlı Urfa)라는 도시에서 1960년 4월 23일 라마단 25번째 날에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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